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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스윙으로 뺨 때려 본 적 있어요?

Jess / 기사승인 : 2020-02-09 16:3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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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있는데.
짝!



경쾌한 소리가 호텔 방 안에 울려 퍼지고 침대 위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남자의 몸은 뒤로 넘어갔다.


"난 여기서 잘 거니까, 넌 자든 말든 알아서 해."


나는 등을 돌리고 누웠다. 잠시 후 부스럭 거리는 소리와 함께 침대 반대쪽 끄트머리로부터 묵직한 진동이 느껴진다. 사람이 뻔뻔해도 정도가 있지, 내가 어떻게 저런 놈을....






소개팅은 질보다 양, 확률 싸움이다. 일 년 내내 쉬지 않고 소개팅을 한 끝에 간신히 찾아낸 괜찮(아 보이는)은 남자였다. 연애는 짧게 하고 결혼을 서두르자는 그 사람의 말을 또 철석같이 믿어 버린 나는 이번에야말로 정말이겠지, 하며 핑크빛 미래를 꿈꿨다. 나이도 적당하고 외모도 그럭저럭 내 스타일이기도 했지만 내가 만나왔던 사람들 중 가장 높은 학력에, 많은 돈을 버는 사람이었다. 개룡남의 특징이라 했던가 돈을 잘 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그렇게 허세를 부렸다. 레스토랑에서 뭘 먹을까 고민할 때면 늘 선심 쓰듯 "고민하지 말고 맛있는 거 먹어~ 오빠랑 만나면 가격 같은 건 신경 안 써도 돼. 일반 직장인들이랑 만나면~.."을 늘어놓았다. 간혹 정말 비싼 메뉴도 있었겠지만 사실 1-2만 원짜리가 더 많았다. 그래도 일단 나한테 돈을 잘 쓰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애인에게 잘 보이고 싶은 귀여운 허세 정도로만 생각하고 넘겼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말을 하는 놈이 정상적일 리가 없는데, 내가 눈이 멀어도 한참 멀었었다.




다정하고, 연락 잘 되고, 돈도 잘 쓰고.. 좋은 점도 많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굉장히 잘 맞는 커플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단 각자의 문과 감성과 이과 감성이 거세게 충돌했고 나는 그 사람의 허접한 맞춤법과 같잖은 허세가 마음에 안 들었다. 그 사람은 내가 굉장히 순식간에 빡 돌며, 또 상처가 되는 말들을 내뱉는 걸 싫어했다. 그래도 한 가지 둘 다 놀만큼 놀고 만날 만큼 만나 봤다며 사람 거기서 거기라는 점에는 동감했다. 그랬기에 삐걱 대는 관계를 어떻게든 맞춰가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던 것 같다. 일단 서로 끌리는 건 분명하고, 좋아하는 마음이 있으니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워대도 금세 잘 화해했고 잠시 뿐이었지만 관계는 더 깊어지는 것 같았다.




목사 아들이었다. 회의적인 종교관을 가지고 있는 나지만 그와 결혼한다면 매주 교회를 나가는 건 물론 십일조를 내도 괜찮아- 까지 스스로와 타협이 완료된 상태였다. 그가 내 마지막 기회라고, 그와 함께라면 투닥거리면서도 사이좋게 평범한 가정을 꾸려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나는 많이 지쳐 있었다. 사실은 그가 내 짝이 아니라는 것을 수 십, 수 백가지 전조 증상으로 알고 있으면서도 외면했다. 이제 누군가를 새롭게 알아 가는 것, 애정과 신뢰를 주고받으며 관계를 발전시켜나가는 것을 제발 그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연애 초기는 지긋지긋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으니, 이 정도면 됐지 뭐. 장점으로 단점을 커버할 수 있어. 그렇게 세뇌시키며 우리는 꼭 결혼을 할 거라고, 나에게도 그에게도 최면을 걸었다.




전반적으로 둔하고 솔직한, 곰 같은 사람으로 답답하긴 했지만 믿음은 갔다. 소소한 거짓말을 해도 바로 들통났고 표정을 숨기지도 못했다. 아버님이 애처가 시라며 자기도 꼭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다고, 바람피우는 놈들이 세상에서 가장 싫다며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거짓말쟁이를 만난 적이 있어 트라우마가 심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항상 연락이 잘 되고, 사진도 잘 보내고, 여러 면에서 의심할 점 없게 행동했고 그렇게 나는 그를 완전히 신뢰하게 되었다. 어쩌면 그게 내가 그 사람과 결혼을 결심했던 가장 큰 이유였던 것 같다. 얕은 물속을 들여다보듯, 속이 훤히 보이는 사람이었으니까. 적어도 나한테 뭘 숨기지는 않겠지, 문제가 있어도 함께 잘 해결해 나갈 수 있겠지.




그랬으니 얼마나 충격이었을까, 그 사람의 메일에서 나랑 간 적이 없는 호텔 결제 내역을 발견했을 때 말이다.




내가 몰래 뒷조사를 한 것도 아니었다. 오랜만에 함께 간 호캉스에서, 그가 먼저 아이패드 암호를 풀어주며 놀고 있으라고 내밀었던 것이다. 하도 알람이 많이 쌓여 있길래 무심코 클릭한 메일 앱, 온통 카드사 결제 승인 메일들 뿐이었다. 그중 유독 눈에 들어온 것은 불과 열흘 전 익숙한 이름의 호텔에서 결제한 내역이었다. 익숙했던 이유는 나랑 같이 갔었기 때문이 아니라, 며칠 전 그의 호텔 어플 최근 검색어에서 발견했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어.. 이거 뭐야, 오빠? 왜 검색했어?"


"아~ 나 친구가 거기 엄청 좋은 데라고 자랑하길래 궁금해서 찾아봤어. 하루에 50만 원이래. 우리도 갈까..?"


"에이 됐어 무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이 튀어나왔지만 싸한 느낌은 지울 수 없었는데, 결제 내역을 본 순간 내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사실 이미 그 순간 게임 오버였다. 우리 관계는 이미 끝났지만, 과연 뭐라고 변명을 할지 궁금했다. 크게 당황한 그는 그 친구랑 같이 간 거라는 헛소리를 해댔다. 그러더니 자기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것 같았는지 이번에는 혼자 갔던 거라고 말을 바꿨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서 50만 원짜리 고급 호텔을 평일 밤에 뜬금없이 예약을 했다고. 그래서 마음껏 여유도 즐기고 힐링을 했다며.. 그 날 우리가 했던 대화를 찾아보니 일이 늦게 끝나고 피곤하다며 일찍 잤던 날이었다. 나한테 왜 굳이 이렇게까지 거짓말을 했냐고 되물으니 내가 알게 되면 서운해할까 봐 그랬단다. 그러시겠지. 참 이상하게도 화가 나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이상하리만큼 무덤덤했다. 하도 쓰레기 같은 놈들을 많이 만나봐서 무뎌졌는지, 아니면 그놈을 별로 좋아한 게 아니었는지- 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




"오빠, 내가 오해가 아니라 이해를 하려고 노력할 테니까 그냥 솔직하게 말해 줘. 왜 그 날 혼자 호텔을 가야 했고 어떤 고민이 있었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말해주면 그대로 받아들일게."




차분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자 그놈은 침대 끝에 앉아 머리를 쥐어 싸고 한참을 고민하더니 결국에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사실은.. 우리가 얼마 전 또 크게 싸우고 헤어질 뻔했지 않았냐.. 물론 다시 잘 만나기로는 했지만 서로 맞는 짝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어플을 깔았고 거기서 만난 여자랑 가려고 호텔을 잡았다. 예상했던 뻔한 시나리오니 놀랍지도 않았다. 웃긴 건 거기까지 말해놓고, 결국은 끝까지 혼자 잤단다. 그 여자애가 23살이라(TMI의 최고봉이다 정말) 부모님이랑 같이 사는데 갑자기 나올 수가 없다고 해서 결국에는 정말로 혼자 잤고, 오히려 그래서 다행이었고 생각도 정리하고 푹 쉴 수 있어서 좋았다고. 뭐 그래 혼자 잤든 둘이 잤든 아무런 의미는 없다. 진짜인지 아닌지 궁금하지도 않다. 이미 나한테 거짓말을 하고 호텔을 잡았다는 것 자체가 충분한 이별 사유였으니 말이다.




평소 서운한 거 하나만 있어도 눈물부터 콸콸 흘리는 나인데, 이상할 정도로 차분한 모습이 낯설었는지 지가 오히려 왜 안 우냐고 되묻는다. 그러게, 내가 너를 별로 안 좋아했나 봐. 이제야 알겠네. 예전 같으면 울고 불고 난리를 치고 드라마를 찍었을 텐데, 이상하게 화도 안 나고 슬프지도 않아. 그냥 딱, '그럴 놈이었구나-' 한 가지 생각만 들 뿐이었다. 이 놈도 그냥 그럴 놈, 고만고만한 놈이었구나.. 그렇게 거짓말 못하는 것 같더니 정말 중요한 건 다 감쪽같이 속이고 있었구나.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구나- 뭐 그 정도. 할리우드 뺨치게 쿨한 나 자신에 스스로 놀라울 지경이었지만 억울해서 뺨 한대는 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드라마에서처럼 찰지게 뺨 한대쯤 올려붙여보고 싶었는데 알다시피 그럴 일이 현실에서 생각만큼 자주 일어나지는 않으니 말이다.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야, 뺨 한 대만 맞자. 염치가 있으면 그 정도는 해야지."


"... 알았어.."




큰 덩치로 주섬주섬 조신하게 침대 위에 무릎을 꿇고 앉는다. 기회는 한 번뿐, 신중하게 두세 번 각을 재는데 그때마다 찔금거리는 표정이 그렇게 찌질할 수 없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나에게 똥을 준 모든 구남친들에 대한 증오를 담아..




짝!


그 뻔뻔한 놈과는 다음 날 조식까지 함께 먹고 헤어졌다. 내가 쿨한 거야 내 맘이지만, 내가 아무렇지 않다고 대역 죄인인 지까지 똑같이 구는 꼴이 가증스러웠다. 마지막에는 "우리 그럼 친한 오빠 동생으로 지낼까? 어려운 일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까지 내뱉었던 것이다. 그렇게 되니 알겠더라. 그 사람이 얼마나 얄팍한 마음으로 나를 대하고 있었는지. 진짜 나를 사랑했다면, 한 순간의 실수였다면 내가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눈물을 펑펑 흘리며 싹싹 빌었을 것이다. 그에게 나는 스쳐 지나가는 무수한 여자 중 하나, 처음엔 좋았는데 이젠 좀 지겹고 귀찮은 여자 친구에 불과했었다는 사실이 차갑게 와 닿았다.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는 참 헤어질 기회가 많았다. 틈만 나면 싸워댔으니 말이다. 정말이지 '다른 재료로' 만들어진 두 사람이었기에 언젠가는 끝내야 하는 인연인 것도 알고 있었다. 그저 모른 채 했을 뿐. 하지만 매번 위기가 올 때면 아이처럼 엉엉 울며 약한 모습을 보였던 그였다. 이렇게 좋아하는데, 어떻게 헤어져.. 그래 놓고 며칠 후 다른 여자랑 호텔을 잡아? 참 모르겠다 정말로, 그냥 나쁜 놈이 되기 싫었던 걸까.




200일 넘게 만났지만 헤어진 그다음 날, 딱 하루만 힘들었다. 그가 그리워서가 아니라 내가 불쌍해서 꺼이꺼이 울었다. 연애에 통달한 것처럼 그렇게 잘난 척을 하더니, 남자 친구를 손바닥 안에 쥐고 있는 것처럼 기세 등등하더니 이 꼴이 뭐야. 너 왜 이렇게 쪽팔리고 불쌍해. 그렇게 당해놓고 왜 또 남자를 믿어. 평소 절대 가족들한테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터놓지 않는데, 그 날은 이상하게 엄마 생각이 자꾸 났다. 엄마 품에 안겨 엉엉 울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해봤다. 그럼 착한 우리 엄마는 나를 꼭 안고 쓰다듬으며 괜찮아, 다 지나갈 거야 하고 다독여 주겠지. 그래 놓고 엄마 마음이 더 아파서 나 몰래 눈물을 훔치겠지 아주 많이.




그놈이 우리 엄마한테까지 상처 주는 꼴은 볼 수는 없으니 엄마는 아마 평생 모를 거다. 하지만 내게 새로운 기준이 생겼다. 나는 엄마의 귀한 딸이기에, 이제 누구든 나를 이렇게 푸대접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내 가치를 알아주고 존중해주는 사람만을 상대할 것이다. 미래의 내 딸이 지금의 나 같은 일을 당한다면 천배 만 배는 더 마음이 아플 것 같아서- 그래서 엄마를 위해서, 나는 꼭 좋은 사람을 만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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