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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그저 머물던 시간 속에서 나를 찾을 수 있었다.

허상범 기자 / 기사승인 : 2020-01-27 19:2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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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머물던 바다> 저자 박오래


책 소개


[그저 머물던 바다]는 박오래 작가의 에세이다.


작가는 2년 전, 제주도 게스트하우스에서 스텝 생활을 했었다. 육지에서의 지지부진한 삶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듯 내려간 곳이 제주도였다. 빈손이 제주에 간다 한들 채워질 리 없었고, 텅 빈 경력란에 적을 만한 시간도 아니었다. 사소한 사건의 연속이었고, 사건도 없이 그런대로 흘러가는 시간이 더 많았다.


무용하게, 그저 머물던 시간 속에서 작가는 자신을 찾을 수 있었다. 바다를 보고, 별을 보고,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좋아하는 공간을 만들었다. 자주 웃고, 편하게 울고, 많이 생각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빈손이라도, 나는 나구나. 이대로도 괜찮구나. 잘 살아있구나.


책에는 제주에서 머물면서 있었던 이야기 스물여섯 편과 육지로 돌아온 후의 이야기 한 편이 실려있다.


작가는 바란다. 느리고 잔잔한 이야기 곁에서 독자분들도 편히 머물다 갈 수 있기를.


[출처: 이후북스]

저자 소개


저자: 박오래


목차


총 254페이지


본문


B가 있는 방의 등은 늦게까지 꺼지지 않았다. 나는 다음날 조식으로 제공되는 빵과 요구르트를 준비하다가 평소보다 조금 늦게 잠들었다. 잠들기 전 본 시계는 열두 시가 지나 있었다. 오늘이 된 내일, B는 이 작은 동네 안에서 무엇을 하고 지낼까. 나는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B는 새벽과 아침의 경계 즈음 되는 시간에 일어났다. 먼저 깨서 멍하니 핸드폰을 만지던 나는 방문을 열고 나오는 B의 모습에 놀라 물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혹시 제가 너무 시끄럽게 움직였나요?"


"아뇨, 제가 깨려고 알람 맞춰 뒀었어요."


조식을 열 시에 신청하신 분이 이 시간에 알람이라니. 다른 일이 있는지 묻자 B가 답했다.


"이곳 아침노을이 정말 예쁘거든요. 서쪽 동네라 해는 보이지 않는데, 하늘 전체가 주황색으로 물들면서 세상이 천천히, 조용히 밝아져요."


B는 말을 마치면서 웃옷의 지퍼를 올렸다. 이미 외출복을 단단히 입은 B는 다녀오겠습니다, 하는 인사를 하고는 집 밖으로 나갔다. 사람 소리에 태준이(옆집 개)가 우리 집 마당까지 뛰어오는 게 창문 너머로 보였다. B는 태준이와도 익숙하게 인사를 하고는 골목 너머로 사라졌다.


그날은 아쉽게도- 제주답지 않게 미세먼지가 심한 날이었다. 아침노을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고, 노을을 보고자 나갔던 B는 동네 산책으로 만족하고 들어와야 했다.


"그래도 좋았어요. 해변까지 걸어가서 비양도도 보고, 군데군데 자리한 백년초도 보고."


하지만 못내 아쉬움이 남았던지 늦게 준비된 식사 자리에서 B가 말했다. 여기 머무는 동안 해가 뜨는 시간에 꼭 나가보라고. 나가서 하늘을 보라고. 해가 보이지 않아 더 환상적인 아침을. 그 주황색을.


아침 식사를 마친 B는 작은 손가방을 들고 나섰다.


"오늘은 어디로 가세요?"


"멀리 안 가고, 동네 안에 있을 거에요. 산책 좀 하다가, 어제 이야기했던 가게 갔다가, 도서관에 가려고요."


"도서관이요? 여기 도서관이 있어요?"


"네, 여기서 나가서 왼쪽으로 가는 큰길 가에 있어요."


알고 보니 나도 몇 번이나 지나다닌 길목이었다. 유심히 보지 않아 몰랐다고 하자, B는 그럴 수 있다며 웃었다.


"워낙 작고 유명하지도 않으니, 그럴 수 있죠."


B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책 좋아하세요?"


"네!"


"그러면 꼭 가보세요. 조용하고, 찾는 사람도 많지 않아서 느긋하게 책 읽기 좋아요."


B는 그 장소 이야기를 하며 좋다는 표현을 반복해서 썼다. 제주도에서 도서관 이야기를 들은 것도, 그런 곳에 꼭 가보라는 말을 들은 것도 처음이었다. 낯선 추천 앞에서, 나는 한 박자 느리게 고개만 주억거릴 뿐이었다.


이야기를 마친 B는 나갔고, 나는 설거지와 청소와 세탁을 마친 후 잠시 의자에 앉아 이 동네를 생각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은 곳이라는 표현을 곱씹었다.


- 12페이지 중에서 -


물 위에 누운 채 눈을 뜨는 순간이에요. 눈앞에 별이 쏟아질 듯 가득해서, 내가 꼭 그 가운데- 별 가운데를 유영하는 기분이 들거든요…."


이야기만 들어도 심장이 뛰었다. 까만 물, 까만 하늘, 그중에 유일하게 빛나는 수억 개의 별들. 전해 듣기만 해도, 전해 듣는 이미지만 해도 이렇게나 아름다운데 직접 경험해보면 얼마나 좋을까. 세상 모든 걸 잊어도 기억할 만큼 좋지 않을까. 생각이 들자 당장에 경험해야겠다는 강렬한 욕구가 생겨났다.


"저도 꼭 수영할게요!"


아직은 못하지만, 이라는 뒷말은 혀 아래쪽에 눌러둔 채. 그분은 내 외침에 꼭 하라며, 한 번 더 그 환상적인 순간에 대한 묘사를 시작하셨고, 나는 그걸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밤에 수영할 수 있는 정도가 되기까지는 날이 좀 더 풀려야 했다. 그러니까 그전까지 낮의 바다에 들락날락하며 수영 실력을 기르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비록 예전에야 한 달 동안 수영장 물을 매일 처먹어도 실력이 늘지 않았었지만, 지금의 박오래는 그 시절의 박오래와 같지 않을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과 긍정이 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일단 나이부터 다르니까, 다른 것도 다르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이었다.


바로 다음 날 아주 후줄근한 옷을 입고 해변으로 갔다. 원피스에 정장바지도 예사로 입고 있는 관광객들 사이에서 극한의 편안함을 추구하자니 새삼스레 민망했다. 하지만 바다 쪽을 살펴보니 날이 풀린 걸 알고 수영을 하거나 몸을 담근 사람이 몇 명 보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나처럼 편한 옷을 입고 있었다.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은 언제나 자신감을 주었다.


스트레칭을 하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남들 하 하는 수영인데, 뭐 그리 오래 걸리겠어? 그리고 내가 뭐 대회 나가겠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동네 앞바다에서 헤엄 좀 치겠다는데, 정석으로 배울 필요도 없으니 실전용 동작만 몇 개 익히면 되겠지. 며칠 동안 물 안에서 허우적대다 보면 어느 순간 앞으로 나아가고 있을 거야.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는데, 나는 모로 가도 배영까지만 하면 더할 나위 없겠다. (구체적인 계획도 없는 주제에 누워서 수영하면서 하늘을 보겠다는 거창한 꿈을 꾸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물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제는 물이 명치에 닿을 듯 말 듯 했다. 발을 살짝 들었다. 그대로 앞으로든 뒤로든 누워서 팔이랑 다리를 저으면 되겠지-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수영을 하겠다고 우기는 뇌와 달리 사지는 영 말을 듣지 않아서, 발은 들기가 무섭게 허우적대거나 굽혀지지 않고 다시 바닥에 꽂혔다. 상체는 꼿꼿하게 수직을 유지했다. 팔은 말할 것도 없었다. 남들에게 구조요청으로나 오해받지 않으면 다행일 꼴로 몇 번 빙빙 돌다가 끝이었다.


이럴 수는 없었다. 그래도 조금 수영하는 폼이, 아니, 못해도 개헤엄은 될 줄 알았는데. 이렇게까지 못할 일이 있나 싶었다. 몇 번을 시도해도 매번 마찬가지였고, 갈수록 지친 팔다리는 약간의 각도를 트는 그것조차 하기 싫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심지어 콧물까지 주륵 흘렀다. 이쯤되니 헛웃음이 났다. 아직 날도 덜 풀린 3월, 수영 하나 하겠다고 여기까지 왔는데 수영은커녕 감기만 달고 들어가겠네 싶어서. 더 심해지기 전에 어서 집 가서 따뜻한 물에 씻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114페이지 중에서 -


게스트하우스에서는 꼭 지켜야 할 규칙이 몇 개 있었다. 민가 근처에 있으니 너무 시끄럽게 떠들지 말기. 11시 이후 소등. 흡연은 밖에서. 이외에도 자질구레한 게 몇 개 더 있었는데 단 한 가지 항목을 제외하고는 각자 합리적인 이유가 분명했으므로 손님들은 '왜요?' 같은 추가 질문 없이 수긍했다. 말인즉슨, 그 한 항목에는 언제나 질문이 따랐다는 소리다.


문제의 항목은 다음과 같았다.


샤워할 때 온수 10분 이상 연속 사용 금지.


정말로, 모든 손님이 왜요? 라고 물었다. 손님들뿐만이 아니었다. 나도 처음에 와서 인수인계를 받으며 그 사실을 들었을 때 왜요? 라고 물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게스트하우스가 순간온수기를 이용하는데 그 용량이 크지 않아서였다. 정확히 10분은 아니고, 너무 오래 연속으로 사용하면 제대로 작동되지 않을 수 있으니 10분에 한 번씩은 잠시 물 사용을 멈추는 게 문제없이 가장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깜빡 잊고 너무 오래 쓰면요? 그럼 찬물에 씻으셔야죠. 내가 사장님께 물어보자 담담하게 말씀하셨다. 나는 안 잊겠습니다. 라고 결연히 대답했다. 내가 도착하던 2월의 제주는 몹시 추웠으므로.


처음에는 그 시스템이 불편했다. 육지에서 샤워를 한 시간 넘게 하던 습관이 들어있던 나는(뜨거운 물 아래에서 멍하니 서 있는 걸 좋아한다) 몇 번이나 온수기를 꺼트렸고, 그때마다 덜덜 떨면서 서둘러 샤워를 마무리하고는 마루에 축축한 발자국을 남기며 온수기가 있는 곳까지 달려갔다. 온수기는 집안이 아닌 집 바깥의 별채(별채라는 표현이 적절한지 모르겠다. 예전에 화장실이 집 바깥에 있던 시절 변소로 지어진 곳인데, 지금은 변기를 사용하지 않고 청소도구와 온수기만 그 안에 덩그러니 놓여있어 본 이름값은 못하고 있다.


- '세신에 관하여'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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