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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켜도 되는 일기장, 들통나도 괜찮은 비밀

오도현 / 기사승인 : 2019-12-31 23: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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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이슬


책 소개


[김이슬 사담]은 김이슬 작가의 에세이다.


2018년 8월부터 2019년 3월까지 작가가 개인적으로 연재한 사담을 엮은 책으로, 56개의 사담과 그에 걸맞는 56개의 부록 그리고 1개의 미공개 사담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가에게 있어 언젠가부터 술에 취하면 "우리, 비밀 얘기하자"라고 말하는 것이 주사가 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무조건 상대방의 비밀 얘기를 먼저 듣는 것인데 어째서인지 실패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상대가 말할 비밀을 찾는 동안 나 역시 말할 비밀을 찾고, 상대가 털어놓는 비밀만큼이나 비밀스러운 얘기를 나 역시 털어놓았기 때문이었다.


'나에게는 말할 비밀이 많다. 말할 수 없는 것은 끝내 말할 수 없으므로 당신과 나는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는다.'


김이슬 작가의 에세이 [김이슬 사담]은 들켜도 되는 일기장이다. 들통나도 괜찮은 비밀이다. 여전히 누군가는 '너무 솔직한 거 아니야?', '네 책, 어머니가 읽어도 돼?' 같은 걸 작가에게 묻지만 작가는 한 번도 자신의 얘길 한 적이 없다고 한다.



[출처: 이후북스]

저자 소개


저자: 김이슬


목차


사랑해, 좋아하지 않을 뿐 10 / 허그 미 타이트 14 / 나랑 나 18 / 자꾸 살아난다 24 / 울보 내 동생 28 / 당신의 절반 34 / 비겁한 지출 40 / 희망을 그대 품에 46 / 태풍이 지나가고 52 / 스몰 플레이스 58 / 가장 영리한 인류 64 / 티비를 켰어 70 / 괴담 원정대 76 / 그래도 너는 82 / 사랑의 환영 88 / 거짓이 없는 말들 94 / 눈은 두 개, 눈빛은 여러 개 98 / 꿀떡꿀떡 102 / 끼니 전화 106 / 이제 와서 자전거 112 / 확인의 순간들 120 / 각자의 사정 126 / 죽여주는 잠버릇 132 / 해피 벌쓰데이 138 / 나를 살찌운 것 144 / 몇 개의 구멍 150 / 쓸개 없는 여자 156 / 두 세계의 교집합 172 / 전학생 라이프 180 / 싱크로니시티 186 / 없는 일과 192 / 수능 전야 196 / 등장인물 204 / 믿는 자 208 / 유행시대 218 / 무관심의 관심 224 / 마이 네임 이즈 230 / 촌스러운 인간 236 / 달콤한 가게 242 / 최악의 크리스마스 248 / 옮겨 담기 256 / 경계를 넘는 사람 262 / 돌아가는 버스 266 / 왼손 네 번째 손가락 270 / 벽의 기분 276 / 양의 시간을 접고 282 / 취하거나 중독되거나 288 / 너의 자세 294 / 가재는 가재 편 298 / 고정 수입 304 / 치과와 코털의 연관관계 308 / 동네 주민 관찰기 314 / 당장의 미학 324 / 오해를 거듭하면 330 / 매듭이 필요해 334


[미공개 사담]


겨울에 필요한 건 따뜻한 343


본문



순자씨는 햇수로 오 년간 냉면집에서 일했다. 함흥냉면 집이었는데 고기도 팔았다. 밥도 팔았다. 가게 주인은 순자씨의 계모임 멤버 중 한 명인 익환이 이모였다. 아들 이름이 익환이었다. 익환이 이모는 그 시절 우리에게 자신의 주택 지하 단칸방과 일자리를 내어 준 슈퍼히어로였다. 익환이 이모가 얼마나 많은 바퀴벌레를 나 대신 잡아 주었는지 손으로 셀 수 없는 걸 보면 그녀는 명백한 은인이다.


아홉 살 김이슬은 변비가 심했다. 잘 먹지 않는 게 첫 번째 이유였고, 편식이 두 번째 이유였다. 정말이지 지지리도 똥을 누지 못했다. 드물게 신호가 와도 염소 똥같이 딱딱하고 동그란 거 몇 개 누는 게 다여서 늘 배가 볼록했다.


안 그래도 노란 피부의 아이가 누런 피부로 변해갈 때쯤 순자씨는 결심한 듯 내 등굣길에 이렇게 말했다.


"뚜리얌, 학교 끝나면 바로 가게로 와, 알았지? 꼭."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던 배가 볼록한 누런 아이는 마냥 해맑았다.


그리고 정확히 여섯 시간 뒤 김이슬은 냉면집 카운터 아래에 엎드려 있었다. 그 뒤로 조그만 튜브 통을 손에 꼭 쥔 순자씨가 있었다. 뭣도 모르고 끌려온 아니 실은 제 발로 걸어온 김이슬은 몹시도 억울했지만, 별수 없이 얌전히 팬티를 내렸다. 천장을 향해 엉덩이를 쑥 쳐드니 똥꼬로 관장약이 졸졸졸 들어왔다.


그 순간 김이슬은 목욕탕에서 때를 밀어주는 사람과 똥꼬에 관장약을 넣어 주는 사람이 동일인물이란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창피했다. 따지고 보면 때가 더 더러운 건데. 목욕탕에선 맨몸으로 종일 거품 놀이를 해도 창피하지가 않은데.


순자씨가 내 팬티와 바지를 추어올리며 다 됐다, 이제 십 분만 참으면 돼, 할 때까지도 나는 꼼짝 않고 엎드려 있었다. 어서 저녁 장사를 시작했으면, 아무나 들어와 뭐라도 시켰으면 그래서 순자씨가 그 테이블로 주문을 받으러 갔으면 하고 속으로 바라면서였다. 그러나 냉면을 먹으러 오는 사람이 없어서 나는 말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 잠깐만 저리 가면 안 돼? 내가 똥 마려우면 부를게. 아니야. 그냥 화장실도 내가 알아서 갈게, 그러니까 좀 가.


"지지배, 간다, 가. 대신 너 꼭 십 분 참아야 해. 알았지?"


알았으니까 엄마, 절루 가. 빨리.


순자씨를 주방으로 보내고 삼 분쯤 지났을까. 올 것이 너무 빨리 오고 말았다. 십 분은 무슨, 아홉 살에 똥싸개가 될 순 없어서 당장 화장실에 가야 했다. 똥꼬에 힘을 빡 준 채 가게에 딸린 조그만 화장실로 엉금엉금 기어가다시피 하는데 누군가 나를 쑥 들어 올렸다.


"안돼, 약사 선생님이 십 분 참으랬어."


엄마, 나 못 참아. 똥이 나온다니까!


그러나 순자씨는 무척이나 힘이 셌다. 냉면 그릇을 날라서 그런가, 고기 판을 갈아서 그런가. 팔다리가 그렇게나 얇은 사람이 나를 번쩍 들어 올려 품에 꽉 안고는 절대 놔주지 않았다. 배는 찢어질 거 같고 똥싸개는 될 수 없어서 나는 눈물이 터졌다.


막막해서 광광 울었다.


"오 분만, 오 분만 참자."


자꾸 오 분만, 오 분만, 하는 순자씨가 처음으로 야속했다. 오 분만, 오 분만이 삼 분만, 삼 분만이 되고 일 분만, 일 분만이 될 때까지 순자씨는 울다 지쳐 똥 씹은 표정으로 안겨 있는 내 등을 푹푹 쓸어주었다. 똥도 못 누게 하는 이 야속한 사람의 두꺼운 손이 자꾸 좋아지려 해서 속이 탔다.


내 이십구 년 중 오 년은 고스란히 순자씨 품에서 자랐을 거다. 그 품에 안겼던 걸 함하면 오 년도 훌쩍 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녀 품에 안긴 게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가장 꽉 안겼던 순간을 생각하면 단연 저 때가 떠오른다.


나는 방문을 꼭 닫은 채 옷을 갈아입는 자식으로 컸고, 순자씨는 흐른 세월만큼 노쇠하다.



그럼에도 허그 미 타이트.


필요한 밤들이 있다.


~~~


서로를 껴안을 때마다 새로운 세계가 탄생해서 우리는 안기를 멈출 수 없다. 그 세계가 낯설게 따뜻해서.



- '허그 미 타이트' 중에서 -


내가 들은 최악의 이별 대사를 당신께 소개한다.



"네 눈빛 때문이야. 죽어도 고칠 수 없는 거야."


고쳐야 할 것도 아니고, 를 덧붙이긴 했으나 정신이 반쯤 나간 내게 뒷말이 들릴 리 없었다. 성격도 외모도 키스 실력이나 잠자리 궁합도 아닌 고작 눈빛이라니. 기가 차서 헛웃음이 나왔다.


네가 하는 말이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해? 싫어졌으면 싫어졌다고 말해.


"싫어하지 않아."


비겁해.


얘가 진정 내가 사랑하는 애기 맞는지 나는 헷갈리다 못해 당혹스러웠다. 여전히 사랑스러운 애인의 얼굴과 그런 애인이 내뱉는 잔인한 말이 내 눈과 귀를 각기 다른 방향으로 어지럽혔다.


나는 간신히 정신을 부여잡았다. 그를 미워하는 방향으로 아주 간신히. 내게 상처 주기 싫어서 혹은 끝까지 악역은 되기 싫어서 그런 거라면 저딴 개소리는 꺼내지 말아야 했다.


눈빛이라니.


이렇게까지 모호하고 구체적일 수 있다니.


덕분에 한동안은 누구와도 눈을 맞추기가 힘들었다.


지금 내 앞의 사람도 내게서 나의 옛 애인과 같은 것을 볼까. 내 눈에서 같은 걸 느낄까. 그렇다면 그건 무얼까. 사람들은 설명할 수 있을까. 나를 이해시키기에 충분한 말들을 가지고 있을까.



내 눈빛이란 건 뭘까.


나의 비겁한 애인은 영영 모를 거였다. 우리의 엔딩씬이, 본인의 엔딩 대사가 나를 얼마나 옭아맬지를, 내가 이토록 겁이 많고 소심하여 이런 거 하나 쿨하게 흘려듣질 못하고 내내 가슴 속에 담아둘 것을 그 개자식은 정말 모를 거였다.


그가 내게서 보았다는 눈빛을 미친 듯이 생각해 봐도 알아낼 수 있는 건 한 가지 뿐이었다. 나는 끝내 나를 볼 수 없다는 것.


나는 내 눈빛을 볼 수 없다. 그러니 알 수 없다.


나는 나와 눈 마주칠 수 없다.


내가 나를 마주하기 위해선 나 아닌 무언가를 거쳐야 한다. 무언가는 거울일 수도 어느 가게의 쇼윈도일 수도 나를 좀 알거나 아예 모르는 사람일 수도 있다. 고작 겉모습 하나도 외부 세계를 통하지 않고선 관찰이 불가하다는 게 내게서 나를 서먹하게 만든다.


하지만 결코 외부 세계도 완벽한 것은 아니다. 나는 거울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없고 나와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의 말은 어딘가 성에 차지 않거나 제각각이기 때문에 그들의 언어를 내 멋대로 해석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자 동시에 최악이기 때문이다.


네가 보는 내 눈빛은 어때? 주변 사람들에게 물었을 때 돌아온 대답은 이러했다.


사람1 : 글쎄, 좀 묘하지. 눈매는 맹한데 눈빛은 매섭달까.


사람2 : 의사 표현이 어마어마하지.


사람3 : 어쩔 땐 다정하고 어쩔 땐 어휴.


사람4 : 그냥 있으면 좀 재수 없는 편?


사람5 : 눈웃음을 치지. 아아. 눈빛, 눈빛이라…….



그러다 내 자초지종을 들은 한 친구의 대답에 내 지금까지의 궁금증이 얼마나 대책 없는지를 깨달아 버렸다.


"우리는 서로 사랑한 적이 없어서 나는 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쳐다볼 때의 눈빛을 몰라. 네가 날 바라보는 눈빛만 알지. 그러니 네가 말하는 눈빛이란 게 꼭 하나가 아닐 수도 있어. 또 모르지, 너와 눈 맞추는 이들의 숫자만큼일지도."


이제는 애인이 보았다는 내 눈빛을 궁금해하지 않는다. 친구의 말이 옳다면 이 질문의 답을 아는 유일한 사람인 애인이 더는 내 곁에 없어서 말이다.


그리하여 지금부터는 내가 날 바라볼 때의 눈빛을 알고 싶은 것이다.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을 볼 때의 눈빛인지 미워하는 사람을 볼 때의 눈빛인지. 따뜻은 한지 다정이 남아는 있는지.


그러나 영영 모를 것이므로 이 역시도 내 멋대로 생각할 수밖에는 없는데 도통 어떻다 여겨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내가 내 곁에 없을 리는 없어서 천천히 알아도 좋을 거였다.


~~~


내가 나를 볼 수 없는 구조로 우릴 만든 건 신의 계획일지 모른다. 텅 빈 눈동자를 마주한 인간의 끝나지 않는 울음을 신이라고 듣고 싶겠는지.


- '눈은 두 개, 눈빛은 여러 개'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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