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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작가의 광주 여섯 장소에 대한 흑백필름

김미진 기자 / 기사승인 : 2019-12-31 23:3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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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_광주모노그래프1> 저자 장은진, 김형중, 김만석, 정명중, 김상철, 최경지


책 소개



[길_광주모노그래프1]은 장은진, 김형중, 김만석, 정명중, 김상철, 최경지 여섯 작가들이 각자의 시선으로 '길'에 대해 집필한 에세이다.


'길'에 대한 이야기는 누구라도 가지고 있기에 필자를 선정하는데 많은 고심이 필요했다. 하지만 '누구나' 가지고 있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라도 그 '누구나'를 대신하여 말해 줄 대표 이야기꾼이 없다면 이야기는 그냥 기억의 편린으로 존재할 것이기에 몇몇의 전문 필자로 축약하는 것이 불가피했다. 그래서 가능하면 각기 다른 문체를 가진 필자들을 섭외하였다. 이렇게 모인 6명의 대표 이야기꾼들은 길에 얽힌 저마다의 기억을 소환해내고, 그 결과 송정동, 양림동과 사직공원, 중흥동 달뫼마을, 수기동, 지산동의 도내기 시장, 동명동 등 6개의 장소에 대한 흑백필름이 더해졌다.


[출처: 인디펍]

저자 소개


저자: 장은진, 김형중, 김만석, 정명중, 김상철, 최경지


장은진


1976년 광주에서 태어나 2002년 전남일보 신춘문예와 2004년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데뷔했다. 소설집 『키친 실험실』, 『빈집을 두드리다』, 장편소설 『앨리스의 생활방식』,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 『그녀의 집은 어디인가』, 『날짜 없음』이 있다. 문학동네작가상, 이효석문학상을 수상했다.


김형중


1968년 광주에서 태어나 전남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0년 문학동네신인상 평론 부문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평론집으로 『켄타로우스의 비평』, 『변장한 유토피아』, 『후르비네크의 혀』, 『단 한 권의 책』,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 있으며, 산문집 『평론가 K씨는 광주에서만 살았다』가 있다. 소천비평문학상(2008)과 팔봉비평문학상(2017)을 수상하였다. 현재 문학평론가이자 조선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김상철


광주에서 출생했고, 광주에서 자랐고, 광주에서 사는 광주 토박이로 IT업계에 종사하면서도 속은 아날로그 심성으로 가득 차 있다. 중년에 눈뜬 인문학으로 복잡다단한 이 세상을 이해해보려 애쓰는 평범한 일반인이다. 전남대학교 문화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현재 (주)나라테크 대표이다.


김만석


미술비평가이자 문학연구자인 김만석은 광주와 전남 지역의 근대 문화사에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좋은 동료들을 만나 [광주모더니즘] 세미나를 함께 하고 있는 중이다. 여러 경로로 '잡다'하게 퍼져 나가 있는 관심들이 광주, 전남의 역사를 통해서 수렴되고 있어 앞으로도 자주 오갈 예정이다. 아직 만나지 못한 광대한 세계가 여기에 있으니 말이다.


정명중


광주에서 나고 자랐다.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문학박사). 저서로 『신자유주의와 감성』, 『애도의 정지학』(공저), 『공감장이란 무엇인가?』(공저) 등이 있다. 현재 전남대학교 대학원 호남학과 주임교수 및 호남학연구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목차


서문 4


나의 인생길, 송정리 11 / 응답하라, 양림동 45 / 1930년 수기옥정 봄 77 / 그 아이를 만나러 가는 길 119 / 노스탤지어가 흐르는 곳, 골목길의 풍경 151 / 아주 사(私, 史)적인 동명동 산책 197


본문


1


가지처럼 뻗은 여러 갈래의 길 앞에서 길을 생각한다. 나를 키운 길이다. 나와 함께 나이를 먹어 나의 주름이 된 길이다. '길은 인생이다'라는 말은 진부하지만 괜한 말도 아니다. 시대마다 작가들과 영웅들은 보편적인 그 말을 자주 사용하거나 인생을 통해 이룩한 것들을 '길'에 비유해 말하곤 했다. 그처럼 우리는 길을 걸으며 세월을 먹고, 길을 나서며 울고 웃고, 길 위에 서서 사유하고 분노한다. 그리고 길에 주저앉아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무언가를 걱정한다. 하루를 시작하려면 뜨는 해를 마주 보며 길을 밟아야 하고, 기운을 다한 그 해를 등진 채 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가면 하루가 끝난다. 그것의 반복이 인생이고, 그것이 쌓여 개인의 역사가 된다. 그러다가도 같은 모습으로 항상 거기에 놓여있을 것 같던 길은 어느 날 낯설어 보이기도 하고, 언제나 나를 반갑게 맞아줄 것 같던 길은 어느 순간 차갑게 외면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그렇게 우리는 길 위에서 자라고 늙는다. 길 위에서 배우고 깨닫는다. 그리하여 길의 인생은 곧 우리의 인생이 되고, 우리의 추억과 기억이 된다.


그러나 어쩔 수 없게도 길에 얽힌 추억과 기억은 시간의 흐름 속에 희미하게 닳아, 저 너머로 사라진다. 그 사라진 길을 생각하며 지금 나는 달라진 길을 천천히 걷고 있다.


2


나는 광주에서 태어났고 여지껏 광주를 벗어나 살아본 적이 없다. 지도를 좀 더 확대해 보면 광산구 송정 일대가 내가 성장한 곳이다. 그곳은 1988년 광산군이 광산구로 승격되어 광주시에 편입되기 전까지 '송정리'로 불리던 곳이다. 삼십여 년이 지났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이곳을 편의상 송정리로 부른다. 나 또한 택시 기사님께 목적지를 말할 때마다 '송정리요'라고 무심코 내뱉는 걸 보면 시골 느낌이 물씬 나는 촌스런 그 이름이 내 삶 어딘가에 문신처럼 새겨져 있는 모양이다. 어릴 때부터 입으로 부르고, 또 입안에 오랫동안 담아온 고향의 이름은 함께 자라온 친구의 이름 같은 것이다. 그 친구가 어른이 된 뒤 촌스런 자기 이름이 싫다며 개명을 했어도 내게 그 친구는 촌스런 이름을 가졌던 그때의 친구로 기억된다. 추억을 함께 만들어온 이름은 도저히 개명할 수 없는 것이므로. 추억 속에서만큼은 영원히 처음의 그 이름일 것이므로.


그래서 나는 그 친구를 종종 '송정리'라 부를까 한다.


3


송정리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장소는 '광주송정역'과 거기서 갈라져 나오는 여러 개의 길들이다. 그중 내가 가장 많이 오간 길이라면 '매일시장'을 들 수 있겠다. 어디나 기차가 서는 역을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되고 사람들이 모이기 마련이다. 그곳은 1913년 송정리에 기차역이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장사꾼들에 의해 만들어진 난장이었다. 광주송정역의 역사가 오래된 만큼 그 앞에 자리하게 된 재래시장 또한 무려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역전시장' '매일송정역전시장'으로 불려 왔으나 나는 간단하게 매일 시장이라고 불렀다.


광주송정역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내려오면 오른쪽으로 길게 뻗은 두 개의 길목이 나온다. 첫 번째가 '1003번지'라 불리는 곳이고 두 번째가 매일시장이다. 삼 일이나 오 일마다 장이 서는 데가 아니고 상설시장이라서, 매일매일이 장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나는 그 시장 안쪽 골목 집에서 서너 살 때까지 산 기억이 있다. 그때부터 나는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걸 알았고, 재래식 화장실의 두려움을 알았고, 비행기 소리의 공포를 알았다. 많은 걸 처음으로 알게 된 그 집에서 2년 정도 살다 그 길을 따라 쭉 아래로 내려가면 나오는 '신동'이란 동네로 이사를 갔다. 이사를 간다는 건 그때 안 사실들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잠시 장소를 옮기는 것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사를 간 후 나는 자주 시장 쪽을 쳐다보며 살았다. 시장은 온갖 것들을 파는 데였다. 생선, 야채, 신발, 옷, 고기. 시장은 온갖 가게들이 모여 있는 장소였다. 국밥집, 방앗간, 국숫집, 의상실, 그릇집, 과자집, 닭튀김집, 이불집 등등. 시작은 내 작은 욕망들이 한데 뭉쳐 있는 곳이었다. 그 시절 나는 항상 배가 고픈 아이였다. 집은 가난했고, 형제가 많아 무엇 하나 풍족한 것이 없던 시절이었다. 갖고 싶은 건 많았지만 제때 가져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내가 간절하게 원하는 건 늘 늦게 오거나 시기를 한 박자 놓쳐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시기에 찾아왔다. 그렇게 찾아온 것들에게 나는 소중함을 좀체 느낄 수 없었다. 가난은 내게 그런 것이었다. 제때 누려야 하는 행복을 자꾸 반토막 내는 것. 그럼에도 그걸 온전한 것이라 위로하며 어려운 시절을 건널 수밖에 없는 것.


가난한 엄마는 자식들의 욕망과 바라는 행복을 모른 척했다. 엄마에게는 차라리 그게 속이 편했을 것이다. 일찍 속이 들어버린 자식들 또한 엄마에게 사달라고 조른 적은 없었다. 그저 엄마가 우리의 필요를 알아봐 주거나 눈치 채 줄 때까지 침묵으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기다림은 늘 간절했고, 간절해서 달콤했다.


엄마를 목 놓아 기다리던 곳이 매일시장이 소실점으로 보이던 그 길목이었다. 엄마가 시장에 가는 날이면 나와 동생은 마중을 나가곤 했다. 기다림의 시간만큼 그 길목은 길고 멀었다. 무더운 여름, 우리는 구멍가게 앞에 놓인 대나무 평상에 앉아 다리를 흔들며 시장 쪽을 한 번씩 쳐다봤다. 그러고는 서로에게 말했다. "이번에는 사오겠지?" "그럴 거야." 발가락이 보일 정도로 구두가 떨어진 걸 엄마도 분명 알고 있으니 이번에는 꼭 샌들을 사서 돌아오리라 믿었다. 우리는 설레는 마음을 심장에 품고 황금빛으로 빛나는 길을 오래 쳐다봤다.


엄마는 노랗게 빛나는 길 위로 어둠이 옅게 내려앉을 즈음 땀을 흘리며 돌아왔다. 시장 끝에서 소실점처럼 보이던 엄마가 점점 커지면 우리의 가슴도 덩달아 부풀어 올랐다. 우리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저 집까지 엄마를 따라갔다. 엄마의 손에 들린 무거운 시장바구니를 한 번씩 힐끗 훔쳐봤지만 샌들이 들어있는지 아직 알 수 없었다. 엄마 또한 우리를 놀래켜주려고 일부러 표정 연기를 하며 샌들에 대해 미리 말해주지 않는 것도 같았다. 대문을 열고 들어간 엄마는 수돗가에 장바구니를 내려놓고 사온 것들을 천천히 풀어 놓았다. 고등어, 양파, 콩나물, 멸치젓……. 물건이 하나씩 꺼내질 때마다 기대감으로 심장이 두근댔다. 어떤 모양과 색깔의 샌들일까 상상하며 조바심에 엉덩이를 들썩였다. 그러나 시장바구니가 바닥을 훤히 드러낼 때까지 샌들은 나오지 않았다. 잠시 실망했지만 우리는 그것에도 많이 익숙해진 아이들이었다.


그렇게 무더웠던 여름도 우리는 샌들을 신어보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엄마가 샌들을 사주길 기다리는 것보다 여름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게 더 빠르다는 걸 알았기에, 기다렸다. 신발을 보이지 않아도 되는 방학을 기다렸고, 계절이 바뀌길 기다렸고, 그럼에도 한 번씩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완전히 버리지 못해서 엄마의 빨간 시장바구니를 기다렸고, 내가 갖고 싶은 것들이 무사히 제때 도착하길 간절히 기다렸다.


매일시장은 내가 기다림으로 바라보던 길이었다. 매일 장사가 이루어지는 곳을 따라 매일 갖고 싶은 것들이 새롭게 생겨났으므로, 매일 오매불망 쳐다볼 수밖에 없었던 곳. 나의 욕망이 매일 자라던 곳이었기에 나의 욕망이 매일 배신당했던 곳. '길'은 '기다림'에서 온 단어인지도 모르겠다는 걸 깨닫게 해준 곳이자 기다리는 건 오지 않을 때가 훨씬 더 많다는 걸 어린 나이에 미리 가르쳐준 곳이기도 했다. 그 시절을 통해 단련되어서인지 지금 나는 누구보다 잘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기다림 속에 더 큰 행복이 있다는 걸 알기에 잘 기다릴 줄 아는 어른으로.


매일시장, 그곳은 내게 기다림의 길이었다.


- '나의 인생길, 송정리'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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